[DK 마일스톤] 동국제강 서슴없는 개혁으로 도약하다 <5편> 시련을 성장의 디딤돌 삼아
[DK PEOPLE/동국DNA] 2016.03.16 08:00

 

[DK 마일스톤] 동국제강 서슴없는 개혁으로 도약하다
<5편> 시련을 성장의 디딤돌 삼아

 

대내외 위기들이 많았지만 동국인들의 예지를 모아 더 큰 기회를 만들어나갔던 1980년 초. 동국제강에게 있어서는 구성원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는데요.

 

오늘은 위기를 딛고 일어나 냉연과 후판, 제강 등 생산 기록을 연이어 수립하며 철강전문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던 동국제강의 1980년대 중후반의 발자국을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생산 신기록은 계속된다

 

▲ 1987년 부산제강소 100만 톤 출하 기념식

 

1987년을 전후로 하여 동국제강 인천공장과 부산제강소는 지속적으로 생산 신기록을 갱신합니다. 인천공장은 1986년 7월 제강생산 5만 톤과 압연생산 4만 2,000톤을 기록하며 가동 이래 최고의 생산성을 달성합니다. 30톤 전기로 2기만으로 5만 톤을 생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는데요. 인천공장 직원들이 여름철 피크타임인 3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21시간, 한달에 29일 동안 매일 1,700톤을 생산했기에 실현할 수 있는 기록이었습니다.

 

한편, 부산제강소는 1987년 12월 영업·생산·출하 100만 톤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목표를 달성합니다. 이는 철강업계 단위공장으로서는 최초의 결과였죠. 위 사진은 100만 톤 째 제품을 실은 차량이 계근대를 통과하는 순간인데요. 부산제강소 직원들은 박수와 큰 환호로 자축연을 열었다고 합니다.

 

 

냉연제품, 100만 톤 생산의 금자탑

 

▲ 100만 톤 돌파 90일 작전 결의대회 모습

 

한편, 동국제강그룹의 가족이 된 이후 연합철강(現 동국제강 부산공장)에는 지속적인 설비 투자가 이뤄집니다. 1986년 3월에는 연산 20만톤 규모의 전기아연도금강판(EGI) 공장을 준공하죠. 총 200억원을 투자한 이 곳은 전체 설비를 컴퓨터로 완전 자동화한 최첨단 공장이었습니다. 같은 해 5월에는 프랑스 및 독일에서 설비를 도입해,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갈바륨 강판을 생산하기도 했죠.

 

이처럼 지속적이고 과감한 설비 투자 덕분에 1986년 12월 100만 8,000톤으로 당시 국내 최고 생산량을 기록합니다. 이는 연합철강에 대한 지속적인 경영권 분쟁 속에서, 경영 정상화를 바라는 직원들이 합심해 이뤄낸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의미를 갖습니다.

 

 

320일간의 장기파업을 털어내는 기계 소리

 

▲ 제26기 주주총회를 주재 중인 이홍철 사장

 

사실, 연합철강은 동국제강그룹에 편입된 이후 기존 사원들과 동국제강 경영진 간 노사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986년 6월 연합철강의 노사분규로 69일 동안 공장가동을 멈추기도 했을 정도였죠. 결국 정부의 중재로 동국제강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노사분규 2개월 만에 공장이 정상가동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곧, 연합철강 노조가 부당해고의 이유를 들어 1987년 8월 결의대회를 개최하며 다시 농성이 시작됐습니다. 9월부터는 2주간 전면파업을 단행했으나 노사가 합의점을 찾으면서 겨우 공장을 가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987년의 합의서 불이행을 들어 연합철강 노조는 320일간의 총파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창립 이래 가장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죠. 다행히도 1989년 제27기 주주총회를 통해 양측은 합의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길고 길었던 파업도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부산일보>는 1989년 2월 16일 기사를 통해 조업 재개 이후 부산공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조업을 재개한지 10여일이 지난 15일 하오 부산 남구 감만동 연합철강 부산공장에는 대형 크레인이 다시 움직이고 기계작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파업기간 중 공장 안팎에 나붙었던 깃발과 현수막 벽보가 모두 사라졌고 사내를 오가는 근로자들의 발걸음이 활기찼다.”

연합철강이 정상화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가전제품과 자동차 생산업계에서 주문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연합철강의 제품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이미 업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문이 몰려들자 연합철강은 전국 대리점주들에게 현금 판매를 부탁하는 즐거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부산일보/ 1989년 2월 16일

 

<중앙경제신문>도 1989년 3월 2일자 보도를 통해 연합철강의 파업 후의 모습을 전했습니다.

 

“지난 2월1일 분규가 타결된 이후 공장 기계시설의 보수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마무리되었다. 연철의 생산라인은 지난 달 24일에는 80%, 28일에는 100%의 가동률을 보였다. 3교대 풀가동을 하면서 재가동 한 달 만에 냉연강판 7,800t, 파이프 3,400t을 생산, 이중 일부를 일본에 수출까지 했다. 노사분규 기간 와해되었던 연철의 대리점 조직도 서울 50개를 포함, 전국 총 80개 대리점 가운데 한 개소만 뺀 나머지 대리점이 모두 돌아왔다. 무려 6개월 이상의 장기파업에도 불구하고 연철이 이처럼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연철인과 연철이 갖고 있는 큰 장점 때문이다. 큰 장점이란 기능공의 숙련도와 1등의식에다 냉연 철강산업 국내 선구자로서의 자존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경제신문/ 1989년 3월 2일

 

▲ 장기파업 종료 후 첫 수출제품인 파이프가 선적되는 모습

 

이처럼 활기찬 공장의 모습과 함께 연합철강은 빠르게 정상의 모습을 찾아갔습니다. 기존에 구매해 놓았던 핫코일이 부족해 제 때 물량을 맞추지 못할 것을 대비해 원자재 비상대책까지 마련했죠. 그렇게 힘찬 기계 소리와 함께 장기파업의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난 부산공장은 3월 중순에 완전한 정상화에 들어섰습니다.

 

 

그룹 매출 상위 10위권

 

▲ 압연에서 절단, 포장까지 철저한 검사를 거쳐 생산되는 동국제강의 철근

 

1980년대 무수한 생산 기록들과 320여 일의 파업이라는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한 동국제강. 하지만 이를 디딤돌 삼아 1990년대에 철강 전문그룹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다졌는데요. 그룹 매출이 국내 10위권에 진입한 것은 물론, 제강로에서 제조된 조강(粗鋼)류인 철근과 봉강, 형강, 와어어 롯드, 그리고 중후판과 냉연강판, 아연도강판, 기타 도금강판 등의 판재(版材)류를 연간 300만 톤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죠.


특히 故 장상태 회장이 가지고 있던 자신만의 경영방식도 그룹 매출의 신장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같은 설비를 각 공장에 중복하여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죠. 한 공장에 신규 설비가 들어오면 이에 대한 운용 노하우를 충분히 쌓은 후, 각 작업 환경에 맞게 개선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동국제강 고유의 생산 기술 체계를 확립, 하나의 설비운용 기술이 완벽하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룹 계열사와 각 공장은 철저한 독립경영을 통해 자율성을 높였습니다. 또 각 회사나 공장간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책임의식을 갖추도록 하였는데요. 이런 장상태 회장의 ‘자주화’와 ‘자율화’ 경영 스타일이 정형화된 1990년대, 그룹 매출 10위권 진입이라는 성과도 함께 얻게 되었죠. 무엇보다도 장상태 회장의 경영방식이 한국 기업에 적합한 경영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은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누군가는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합니다. 하지만 기록을 말하다 보면 간혹 결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숫자에 불과할 수 있는 기록이지만, 1980년대 동국제강의 생산 기록들만큼은 당시 동국인들의 열정과 결의, 그리고 노력을 녹여낸 지표로서 더 없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