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파랑, 프러시안 블루
[DK PLAY/트렌드] 2020. 1. 28. 16:32


세상에 누구도 함부로 주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바람이나, 공기, 구름 같이 자연에서 온 것들이죠. 색깔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색은 자연에서 출발하니까요. 나뭇잎에서 초록이 나오고, 하늘에서 파랑이 탄생하죠. 그런데 색을 제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분명 자연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색들이 염료가 되고, 물감이 되면 가격표가 붙죠. 지금은 싸고 쉽게 다양한 색의 물감을 살 수 있지만, 200여 년 전만 해도 물감은 엄청 비싼 재료였습니다. 특히 파란색은 아주 비쌌죠. 파란색으로 물들인 옷과 물건은 오직 부유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었는데요. 파랑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적어도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프러시안 블루가 발견되기 전까지 파란색 안료는 매우 비싼 재료였습니다. 파란색 안료는 주로 대리석의 한 종류인 청금석을 갈아 나무 수액과 섞어 제작했는데요. 청금석은 매우 귀한 돌이었어요. 당시 청금석을 사용해 만든 파란 안료가 금보다 더 비쌌던 것을 보면, 얼마나 귀한 재료였는지 가늠할 수 있죠. 


재료가 비싸니 상품도 비싸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파란색 안료가 사용된 제품들은 왕족이나 귀족만 살 수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값싼 파란색 안료가 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죠. 기존의 파란색 안료보다 싸고, 색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말하자면, 대히트 상품의 등장이었어요. 


그때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멋진 파란색 안료가 누군가의 실수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야기는 18세기 초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영어 이름)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염료제조업자 디스바흐(Diesbach)와 화학자 디펠(Dippel)이죠. 사건은 화학자 디펠의 파렴치한 사기행각에서 시작되었는데요. 디스바흐는 연분홍색 염료를 만들기 위해 디펠에게 잿물을 구입합니다. 


디펠은 디스바흐에게 순도가 높지 않은 잿물을 팔았어요. 그러니까 불순물이 많이 섞인 잿물을 팔았던 거죠. 이를 알 리 없던 디스바흐는 디펠에게 산 잿물을 다른 염료 재료와 섞었어요. 연분홍색을 기대했던 디스바흐는 눈앞에서 이상한 색으로 변하는 염료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옅은 빨간색이었다가, 점점 자주색이 되었죠. 그러더니 이내 새파란 염료가 되어버렸죠.



디스바흐는 파란색이 되어버린 염료를 디펠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대체 어떤 잿물을 팔았길래 연분홍색을 만드는 재료들을 섞었는데 파란색이 나오냐고 말이죠. 디스바흐는 분명 디펠을 쏘아 붙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디펠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란색 염료의 상품 가치를 알아본 거죠. 


디펠은 잿물 재료 값을 돌려주면서 디스바흐에게 어떻게 파란색 염료를 얻게 되었는지 캐물었습니다. 그 후 디펠은 디스바흐의 염료 제조 과정과 자신이 판 잿물에 섞인 불순물을 분석해 파란색 안료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는데요. 그렇게 탄생하게 된 파란색 안료가 바로 프러시안 블루죠. 


사실 처음 이름은 도시 이름을 따 ‘베를린 블루’였습니다. 훗날 프러시아 군대의 군복에 이 염료가 사용되면서 프러시안 블루가 되었는데요. 그렇게 탄생한 프러시안 블루는 많은 화가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디펠을 엄청난 돈방석에 앉게 했죠. 




안료는 별도의 접착제가 필요한 분말 착색제를 뜻합니다. 공업, 산업 건축 분야에서는 도장의 원료를 뜻하고, 그림물감이나 잉크, 페인트, 화장품 등에서는 재료로 쓰이죠. 안료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자연에서 얻은 안료와 여러 재료를 합성해 만드는 안료죠. 


반다이크 브라운이나 번트 엄버, 크림슨 등의 색을 내는 안료는 자연에서 재료를 얻어 만드는 대표적인 색인데요. 요즘에는 합성 안료로 거의 모든 색을 만들 수 있어 자연에서 얻은 안료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요. 자연에서 얻은 색은 그만큼 가격도 비싸서 쉽게 구하기도 어렵죠. 


프러시안 블루는 현대적 합성 안료 기술로 만든 최초의 색이었는데요. 프러시안 블루가 등장하면서 합성 안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죠. 사람들은 색을 자연이 아닌, 몇몇 성분의 조합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디스바흐와 디펠이 어떤 성분들을 혼합해 프러시안 블루를 발견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나온 자료는 없어요. 다만, 프러시안 블루가 세상에 나오고 10여 년 뒤 영국의 화학자 우드워드(Woodward)가 연지벌레를 간 가루와 황산철 등을 섞은 물에 소의 피를 섞어 프러시안 블루를 만든 것을 보면 추측할 수 있죠. 아마도 디스바흐에게 넘겨준 디펠의 잿물에는 소의 피가 섞여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만들어진 경위가 어떻든 프러시안 블루는 인간이 만든 최초의 현대적 합성 안료였습니다. 우드워드가 프러시안 블루의 상세한 제조 과정까지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안료가 됐죠. 




프러시안 블루와 같은 합성 안료가 탄생하면서 물감의 가격은 자연스레 싸졌어요. 이게 어디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쳤을까요? 바로 미술이죠. 물감이 비싸던 시절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림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미술가들에겐 언제나 비싼 물감이 필요했고, 재료 값을 대주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들이었으니까요. 


실제로 18세기 이전 유럽의 미술은 모두 부자와 교회를 위한 것이었어요. 합성 안료가 나오고, 화가들도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되었어요. 이를테면, 빛을 그린 모네라던가, 가난한 노동자를 그린 밀레 같은 화가들 말이죠. 


합성 안료의 등장은 새로운 예술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프러시안 블루가 우연하게 탄생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공부한 미술의 역사가 어쩌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죠. 



프러시안 블루는 이제 우리의 삶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림 물감은 물론이고, 만년필의 잉크에도 프러시안 블루 제품이 있죠. 코트나 바지 등 옷의 염료로도 인기가 많습니다. 특히 셀프 인테리어가 유행하면서 벽지를 도배하는 대신,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 유행했는데요.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을 꾸미고자 하는 이들은 프러시안 블루 계열의 페인트로 공간에 포인트를 주죠. 또 프러시안 블루 색상의 가구도 인기가 많습니다. 


프러시안 블루의 탄생은 미술의 역사를 바꿨고, 지금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누구나의 파랑, 프러시안 블루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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