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제강, 혼란 속 길을 헤맸던 '냉연의 역사'
[DK BRAND/철이야기] 2019.07.19 16:19


▲연합철강 항공사진

 

동국제강 부산공장의 전신은 연합철강이다. 국내 최초의 냉연 메이커로 설립된 연합철강은 국제그룹으로 인수되고 다시 동국제강의 일원이 되기까지 큰 혼란을 겪었다. 특히 동국제강으로 인수된 이후에 사무직으로부터 시작된 인수 거부 운동은 투자와 성장 기회를 모두 놓치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1974년 국내 최초로 1억 불 수출탑을 수상했던 연합철강(현 부산공장) 1976년부터 경영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오일쇼크로 인해 원자재인 핫코일의 가격은 높아진 대신 완제품의 수출 가격은 낮아졌기 때문에 수출을 지속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정부는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폈다. 그러나 수출 1위 기업이 수출을 중단하자 정부에 미운 털이 박힌 것이다. 게다가 연합철강의 사주였던 권 씨는 딸의 골수암 치료를 이유로 회사를 비우고 미국에 장기 체류 중이었다.


당시 연합철강 공장 내부

 

결국, 연합철강은 부도 처리되고 1977년 벽두에 국제그룹이 인수했다. 국제그룹은 연합철강에 대해 관심과 지속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7년 강관공장, 1979년에 착색아연도금설비(No.2 CCL)를 준공했다. 1980년에는 연속아연도금설비(No2. CGL) 공장, 1982년에는 연 25만 톤의 조관기(16인치 유정관 생산)를 도입했다. 1984년에는 열병합 발전소를 준공했다. 연합철강의 임직원들은 회사가 변모하고 성장하면서 긍지와 열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철강의 이런 열정적인 도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단자회사들이 국제그룹 어음을 연장해 주지 않고 마구 교환에 돌리기 시작, 자금난은 표면화됐다. 국제그룹이 부도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결국 정부 주도로 국제그룹 해체가 시작되었다. 연합철강은 4대 그룹 제외, 동종업계, 부산지역의 연고를 가진 기업, 재무구조가 양호한 기업 등 4가지 조건으로 동국제강그룹으로 인수되었다.


▲연합철강 농성 모습


그러나 관 주도의 기업 인수합병에서부터 마찰은 시작되었다. 오해와 루머, 소통 부족이 최장기 분규의 오명을 남겼다. 연합철강의 분규는 1986 6, 사무직 사원을 중심으로 먼저 시작되었다가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위탁경영과 함께 분규를 끝냈다. 그러나 부산공장의 노조를 중심으로 2차 분규가 발생하여 전 공장으로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연합철강은 320일간의 최장기 노사분규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과 함께 경영 전반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당시 노사분규 상황을 담은 신문기사

 

연합철강은 계속된 분규로 인해 1987 4,426억 원이던 매출액 이 1988년에는 1,689억 원으로 두 동강 났고 1989년에도 2,430억 원이라는 형편없는 실적을 기록하고 말았다. 당기순이익도 2년 연속 적자였다.

 

무엇보다 업계 1위의 기업이 투자와 발전의 기회를 놓치는가 하면 국내 거래처가 떠나갔다. 공들여 힘겹게 확보했던 해외 바이어들도 연합철강 제품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외부로부터노사 양쪽 모두 소통이 안 되는 먹통 불통이라는 불명예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부산공장 8CCL 준공식 현장. (오른쪽 네 번째 장세욱 부회장)

 

동국제강은 연합철강을 인수한 이후에 전기아연도강판 공장을 새롭게 건설하고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볼륨을 키워 나갔다. 기업 이름도 유니온스틸로 바꾸었다. 특히 장세욱 사장(현 동국제강 부회장)이 부임한 이후부터는 컬러강판 공장의 신증설에 주력했다. 컬러강판은 세계 1위의 경쟁력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혼란 속에서 투자와 성장의 기회를 모두 놓쳤던 과거의 역사는 이제 다시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기업은항상 높은 경쟁력을 유지해야 생존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 김종대(철강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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