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대의 서막을 연 포항 1후판공장
[DK BRAND/철이야기] 2019. 5. 16. 15:50

포항 제1후판 공장 전경.


동국제강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후판공장을 가동한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다. 용호동 부산공장의 후판공장은 설비가 낙후되어 포항에서 새로운 공장을 건립기로 했다. 포항1후판공장을 포항에 건립한 것은 포스코로부터 원자재인 슬래브를 적기에 사기 위한 조치였다.


1후판공장은 후에 동국제강이 포항 제강소에 새롭게 둥지를 트는 선발대 역할을 했다. 1후판 공장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시기는 1984년도 9월이었다. 그리고 1988 7월 11일에는 후판 사업본부를 설치했다. 본사를 비롯한 부산공장과 인천공장에서 엘리트 기술진이 선발됐다.


이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한 것은 지난 계찬 전 사장(당시 부사장)이었다. 후판 사업본부는 총 21명의 정예 요원을 구성했다. 공기 단축, 공사비 절감, 정밀 시공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후판 사업 본부는 1988 5월 미국 티핀스 설비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1후판 공장 압연 라인.


생산 규모는 연산 70만 톤이었으나 준공 이후에 100만 톤을 넘게 생산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8년 당시에는 국내 후판 수요가 연간 55만 톤이나 모자랐다. 


지금 1후판 설비는 폐쇄되고 설비는 인도네시아로 팔려나갔다. 당시의 설비는 최첨단설비들이었다. 가열로는 구로사키, 밀 스탠드는 독일 티센,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등 10여개 국이 각종 설비를 공급했다.  


1990년 핫런을 거쳐, 1991 6월 5일 준공식을 가진 1후판 공장은 동국제강의 후판 역사에 여러 가지의 기록을 남겼다. 이 공장은 원래 가덕도에 설립하려고 했으나 정부로부터 매립 허가를 얻지 못했다. 첫 예정 부지는 동국산업의 포항 스틸 센터였다. 그러나 장소가 협소하여 포기했고, 포항 철강연관 단지의 33,000평에 최종 후보지를 선정했다


1후판 지역은 조개가 화석이 되면서 융기된 지역이다. 또 아무리 땅을 파도 암석만 나왔던 지역이다. 외견상으로는 암석이었지만 공기와 접촉하면 부스러졌고, 분말조차 물에 스며들지 않는 토질이었다. 고 장상태 회장은 악조건을 극복하고 1,500억 원을 투자하여 공장을 완성했다.


1991년 제 1후판 공장 준공식 현장.


가동 후 초기 2년 동안은 후판 경기가 나빠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조선 경기가 풀리면서 1후판 공장은 큰 수익을 올렸으며, 인천에 100톤 전기로 공장을 건설 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했다. 1후판 공장 건설에 참여했던 직원들은 공장 건설부지가 워낙 외진 지역이어서 처음에는 여관을 빌려 숙박을 하였고, 아침은 버스 주차장 주변에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었다.


허허벌판이라 전화 신청도 불가능했는데, 결국에는 이웃 마을에 전화를 신청해서 산을 넘어 전화선을 가설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후판설비 중 메인은 압연 스탠드였지만 이 설비를 공장네에 설치하기 위해 이동할 때는 이동 거리의 지반이 약해 기술진들은 팔자에 없는 도로 공사까지 맡아야 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2010년 준공된 동국제강 당진공장.


이런 고생 끝에 완공한 1후판공장의 초기 노력으로 지금의 2후판공장과 형강공장, 그리고 철근공장이 무사히 들어서게 된 것이다. 1후판공장의 제품은 1991 11월에 약 850톤을 캐나다에 첫 수출을 했다. 국내 후판 제품이 북미로 수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1후판 공장이 연산 100만 톤을 기록한 것은 공장 완공 후 2 6개월 만이었다. 국내 철강업계는 이때부터 동국제강의 후판 생산 능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했다. 1994년에는 풍산금속으로부터 백동 슬래브의 압연을 의뢰받아 무사히 제품화하기도 했다.


동국제강은 1후판의 성공적인 기술 축적을 기반으로 2후판공장, 당진 후판 공장을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 김 종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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