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제강 <핫 히스토리> '피아트124' 승용차를 생산했던 동국제강
[DK BRAND/철이야기] 2018.08.14 18:11


아세아자동차가 동국제강 그룹의 계열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아세아자동차의 생산 공장은 전남 광주에 소재했었다.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에 드라이브를 걸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광주 자동차 공장을 방문하여 생산현장을 챙기고 부단히 독려했었다. 


그러나 동국제강그룹과 자동차와의 인연은 끝내 지속되지 못하고 제3자에 인수케 되는 멍에를 갖게 된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이란 단어를 동원한다면, 만약 동국제강이 아세아자동차의 경영을 순탄하게 이끌었다면, 오늘날 동국제강은 어떤 모습의 기업이 됐을 것인가? 참으로 기대되고 희망적인 일들이 부풀어지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H제철이 '철강에서 자동차까지'라는 슬로건을 내는 것이 2000년대의 일인데 이미 장상태 사장(당시 직급)은 1970년대에 자동차 산업과 철강 산업과의 연관 관계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아세아자동차의 역사를 되짚어 보자. 아세아자동차는 기아자동차의 전신이다. 회사 명칭은 처음에는 아시아자동차였으나 중도에 아세아로 바뀌었다. 이 회사는 1965년 이문환씨가 창업했다. 한때 이탈리아 피아트의 네임밸류를 등에 업고 국내 자동차 시장에 빅 4로 등장하여 돌풍을 일으켰다.



구라파를 제패한 '피아트124' 승용차가 국내 시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 기세는 대단했다. 아세아는 1968년 2월, 이탈리아 피아트회사와 7년 기간의 기술도입 계약을 맺은 이후 1,767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 각종 차량 조립설비를 갖추었다.


이 차관으로 승용차를 연간 7,200대, 버스 2,400대, 트럭 3,600대 등 도합 1만 3,200대의 생산 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현금 차관까지 끌어들여 단기간에 '피아트 붐'을 조성하여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이문환씨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 시기에 동국제강 장상태 사장(동국제강 2대 회장. 창업자의 3남)은 채권 은행단의 권유로 1969년 12월 이문환씨의 주식을 인수한다. 당시 동국제강은 부산에 대규모의 전기로 공장을 완성하고 제계 순위 7~8위권의 기업으로 우뚝 서있던 기업이었다.


그랬으니 채권은행단이 중화학 공업의 선두 주자인 동국제강에 자동차 기업의 인수를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국제강 그룹 내에서는 자동차 산업의 진출에 반대 입장이었다. 장상태 사장은 그룹 안에서 한동안 고군분투했었다. 형제들을 비롯한 회사 임원들을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절친이었던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도 "장사장이 회사를 인수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골치 아프다"고  2008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혔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정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은행권의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권유 말미에 첨부된 단서도 자동차 산업 진입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정부가 군용 트럭의 생산을 아세아자동차와 합작하여 국내에서 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거절의 명분은 점점 없어지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장경호 회장과 부인 추명수 여사. 장경호 회장은 불교 증흥을 위해 사재 30억 원을 기부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동국제강 창업자 장경호 회장의 군수산업에 대한 거부감은 단호했다. 이전에도 총알 탄피 생산 사업을 정부가 권유했을 때, 장경호 회장은 불자임을 앞세워 "사람을 죽이는 물건은 만들지 않겠다"고 했었다. 동국제강은 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탄피 생산 사업을 하지 않은 반면, 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기업은 동(銅) 제품 생산회사인 P기업이다.


장상태 사장은 아세아자동차의 성장에 팔을 걷어붙였다. 5.16혁명 정부의 내무부장관과 합참의장을 지낸 한신 장군(육군 대장예편)을 아세아자동차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한신 장군은 회사의 전망이 밝지 않은 것에 큰 실망을 했다.


상여금을 전달하자 "회사 운영도 어려운데 무슨 상여금이냐"면서 "회사 운영에 보태쓰라" 고 돌려 주었던 경영자였었다. 한신 장군은 아세아자동차 회장 부임 1년 만에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하여 동국제강의 인연을 끝냈다.


장상태 사장은 아세아 자동차에 지극정성을 쏟았다. 신규 CI(기업이미지 통합)부터 자동차 기술도입에 이르기까지 매우 심사숙고했다. 그 당시 아세아 자동차에 근무했던 이는 김동현 전 동국제강 전무 등이었다. (헬기 추락사고로 작고)


▲포항공장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장상태 회장(가운데)


그의 생존 증언에 의하면 장상태 사장(당시 직급)은 자동차 기술도입에 큰 노력을 기울였는데 일본식이 아닌 피아트124를 전격 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차종은 국내 도로가 포장이 된 곳이 많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우리 실정과는 달리 너무 앞선 고급차종이어서 애로를 겪은 것이다.


당시 부장이었던 계 찬(동국제강 사장 역임)씨의 말을 빌면 "장상태 사장은 자동차 사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다"고 말한다. 아버지 장경호 회장과 여러 형제로부터 고립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아세아 자동차의 증자 문제가 닥치자 거부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당시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부응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항진하였지만 아세아자동차는 증자를 못하게 됨으로써 1973년에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정부는 박정히 대통령의 특별지시를 받아 한국형 소형 승용차 양산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때 아세아는 98%의 국내 고유 모델 승용차를 생산하겠다고 나섰다. 사실은 조립생산이었다.


동국제강은 아세아 자동차를 인수한 이래 8년 동안 회사를 성장 발전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더 이상 자동차 산업을 끌고 갈 여력이 줄어들었다. 잘못하면 모기업인 동국제강까지 흔들릴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을 감지한 정부는 아세아자동차를 기아자동차에 흡수시키게 된다. 아세아자동차의 역사에서 동국제강의 이름도 사라졌다.


브라질에 일관제철소를 20년에 걸쳐 이룩한 동국제강의 끈기처럼 당시에 기업 종사자 전원이 달려들어 자동차 사업을 육성하고 지원했더라면 오늘의 동국제강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국가기간산업의 가장 모범적인 민간 기업으로 자리매김을 했을 것이다.


자동차 산업을 성공시키지 못했던 과거의 씁쓸한 경험은 아쉽지만 교훈이다. 이후로 동국제강에서는 "가장 잘하는 것에 더욱 매진하여 세계 최고가 된다"는 슬로건이 기업경영 전반에 정착되기에 이른다.


실패는 부끄러움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기도 하다. 늘 과감한 혁신과 도전정신을 이끌어내야 밝은 미래가 탄생된다. 역사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거울이다. <끝>



글 : 김종대 (스틸프라이스 대표, 철강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