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가른 철조망 녹여 '평화의 종' 만들자
[DK BRAND/철이야기] 2018.06.05 17:00



4월은 꽃비가 내리는 달이다. 활짝 핀 벚꽃은 작은 바람에도 꽃비를 내린다. 연이어 연산홍이 빨간 꽃잎을 드러내고 진달래와 개나리도 산야를 물들이는 이즈음에 휴전선 평화의 집에서는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린다. 한반도에 봄기운이 따듯하다.


오래전, 헝가리 미클로스 네메트 전 총리는 부시 전 미대통령에게 청동함을 건넸다. 청동함에는 철조망 조각이 담겨있었다. 40여년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갈랐던 상징물이다. 부시는 "내 생애 가장 값진 선물"이라고 반색했다.


wired fence가 어원인 가시철조망은 평화의 메신저로 충분이다. 가시철조망은 1860년대에 미국 중부의 양치기 소년 조지프 F. 글리든과 제이콥 하이시가 처음 만들었다. 양들이 장미 넝쿨을 넘어 관리하기가 어려워지자 철선에 가시를 꼬아 만든 발명품이다.



가시철조망이 시장에 등장하자 게으른 양치기 소년들은 단박에 거부가 됐다. 날이 갈수록 가시철조망은 날개 돋은 듯이 팔렸다. 100파운드당 20달러까지 오르고, 너도 나도 가시철조망을 만들어 냈다. 급기야 가시철조망은 1만 파운드에서 855,000 파운드까지 과잉 생산 되었다. 금시발복은 여기서 끝났다. 파운드당 1.9달러까지 떨어진 것이다.


가시철조망이 대량으로 생산되던 시기는 시카고에 고층 빌딩이 뒤덮던 철강 호황기였으므로 누구나 철조망을 쉽게 만들고 철강공장 건설도 쉬웠다. 동국제강은 1950년대 초부터 80년대 초까지 가시 철선을 생산했었다. 베트남에도 많은 양을 수출했었다. 생산 공장은 영등포 당산동과 부산시 우암동 공장이었다.


목축업자들에게 부를 안겨준 가시철조망은 신이 준 선물이다. 서부 개척시대의 광활한 황야에 풀어 높은 소 떼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미국의 목축업을 크게 번영시켰던 발명품이다.


당시 미국은 홈스테드 법에 따라 한 사람의 목축업자가 137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으므로 드넓은 초원에서 가축을 방목하는데 가시철조망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미국 서부 개척사는 사막에서 목축을 하고, 댐을 만들고, 건조 농사법을 개발한 '카우보이 정신'으로 축약된다. 프레더릭 레밍턴(1861~1909년)의 그림과 오언 위스터(1860~1938)의 서부 소설 속에는 당시 미국 서부 개척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러나 가시철조망의 발명은 사반세기 동안 200 만두의 소 떼를 몰면서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카우보이들의 장거리 이동 장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소 떼를 가만히 앉아서 가둬두고 목축할 수 있었던 이유와 함께 철도가 들어서면서 가축을 미국 전역에 손쉽게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시철조망은 비극적인 일에도 사용되었다. 남북전쟁과 1,2차 세계대전에 철조망은 바리게트로 활용됐다. 카우보이들의 걱정을 줄였던 가시철조망이 이념을 가르는 분단의 상징으로 변질된 것이다.



수일 전 판문점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실무진들이 만났다. 이 뉴스에서도 휴전선의 가시철조망은 텔리비젼 화면에 클로즈업되었다. 씁쓸한 장면이다.


철조망이 이산가족의 왕래를 막는 흉물로 사용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죽했으면 '남북이 가로막혀...'라는 유행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자아내는 이웃은 얼마나 가슴이 메어질까. 가족을 생이별 시키는 철조망이 언제 거두어질 것 인지 정말 한숨만 나온다. 근 일흔 해 동안 한반도의 허리를 옥죄고 있는 가시철조망을 걷어내고, 헝가리 전 총리처럼 남북 정상이 흉물 조각을 서로 건네면서 "이제 통일로 가자"는 빅뉴스가 터졌으면 가슴이 후련하겠다.



휴전선 가시철망을 몽땅 쇳물로 끓여 자유와 통일을 상징하는 '평화의 종'을 만들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끝> 김 종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