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제강 <핫 히스토리> 바다를 메워라
[DK BRAND/철이야기] 2018.05.08 18:05


"아무래도 고척동 부지는 안 되겠다." 

1962년 새해 벽두에 열린 이사회에서 창업자 장경호 회장이 내린 결론이다. 당시 동국제강 본사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이었다. 공장이라고 해봐야 붉은 벽돌 건물과 미군 콘세트 막사 같은 건물이었다.


▲동국제강 당산동공장에서 못을 생산하던 설비


이 공장에는 와이어 롯드 생산용 압연기 1기, 신선공장, 못 공장, 도금공장 등 낡은 기계들이 풀가동되고 있었다. 전후 복구에 필요한 철강재는 엄청나게 부족했다. 이즈음에 장경호 회장은 대규모 철강단지를 새로 건설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하나의 업은 100년을, 하나의 공장은 10년을 내다봐야 한다"는 그의 경영철학은 이미 미국과 일본의 철강공장에 버금가는 공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국책사업으로 해도 어려운 시대에 대규모의 철강공장을 민간자본으로 건설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기도 했다.


▲왼쪽부터 장상돈, 장상건, 장상철, 장상태 회장


아버지의 의중을 파악한 아들 5형제는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즉각 실행에 돌입했다. 장상준(첫째)사장은 5만분의1 지도를 갖고, 1년여 동안 부산과 울산 해안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처음 매입한 곳은 부산 우암동의 1만 5천 평과 경남 진동 해안 일대였으나 장소가 협소하여 취소되었다. 최종 선택지는 선박 입출입이 손쉬운 부산시 남구 용호동 소금벌로 결정됐다. '분깨소금'으로 유명했던 갯벌과 인근바다를 매립하여 현대적인 철강공장을 건설하는 그린필드 방식이 진행됐다. 이 방식은 국내 철강 산업으로서는 드문 선택이었다.


첫 단계인 토목공사에서부터 벽에 부딪혔다. 지금처럼 중장비가 흔치 않았던 극한의 환경 속에서 바다매립은 불가능해 보였다. 전근대적인 방법뿐이었다.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팠고, 아주머니들까지 동원되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바다를 메워 나갔다.


일면 매립, 일면 건설, 일면 생산이라는 초유의 방법이 동원됐다. 바다 일부를 매립하면, 공장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생산된 제품을 팔아 새로운 자본을 만들어 다시 바다를 메우고, 공장을 또 건설하는 식이었다.


1970년 4월에 착공된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영일만 매립공사와는 그 차원이 달랐다. 기술도 일천하고, 공장 건설 경험도 거의 없던 시기에 대규모의 철강공장 건설 사업에 뛰어 들었으니 모든 것은 창업자와 경영에 참여한 5형제의 책임이었다.


▲창업자 장경호 회장과 부인 추명순 여사


온 가족이 뛰어들었다. 창업자의 부인 추명순여사도 인부들의 점심을 직접 지어서 광주리에 담아 이어 날랐다. 공사를 지휘하는 사무실도 담장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다섯 평 규모의 판자 건물이었다. 한 쪽은 사무실, 한 쪽은 창고로 썼다.


공사 중에 태풍이 몰아쳐 매립한 곳이 폭풍에 휩쓸려 나가기도 했다. 공사현장에서는 장단지에 알이 배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고함을 치거나 인부들끼리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고초를 겪자 장회장은 아들들에게 자신의 경영철학을 다시 인지시켰다.


"사람 가는 길은 천 번 물이 꺾이는 것과 같다. 절대 좌절하지 마라."


소금벌 매립광경을 지켜보던 재계에서도 무모한 도전이라고 입을 모았다. 소비재 산업도 많은데 하필 철강 산업에만 고집하느냐는 주위의 시선과 함께 "동국제강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부산 용호동 매립지 공사(1963년)


동국인들은 주위의 우려를 기우로 바꾸었다. 현대적인 철강공장 부지를 만들기 위한 용호동 갯벌 매립 공사가 착공 220일(1965년 10월1일)만에 1공구 2만4,475평을 완공시킨 것이다. 공장에는 독일제 자동압연기와 용광로, 전기로 등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최종 매립된 부지는 22여만 평에 이른다. 소금벌을 메운 부산 용호동 공장은 동국제강의 산파역이자 탯줄 같은 공장이다. 근 35년 동안 와이어 롯드, 철근, 형강, 중후판 등을 국내외 시장에 공급하면서 사세는 급신장되었다.


동국제강 부산제강소의 건설과정을 지켜본 박정희대통령도 직접 현장을 방문했다. 장경호회장에게 국책사업인 제철소건설을 맡으라는 권유도 했다. 장상태 사장은 박대통령과 관계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철소 건설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소상하게 브리핑했다.


결국, 민간자본으로의 제철소 건설 불참의사를 완곡히 전달한 것이다. 이후로 제철소 사업은 포항제철에 맡겨졌다. 동국제강이 검토했던 상세한 선진국 사례들의 자료도 함께 넘겨졌다.


새로운 대규모 공장이 완성된 이후로 사세가 높아진 동국제강은 부실화 된 서울제강, 부산제철, 한국강업, 한국철강, 삼화제철소 등을 인수하여 정상화 시키고 일관제철공정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1971년도 동국제강의 재계 순위는 3위로 올라섰다. 호남정유, 신진자동차 다음이었다.


▲부산 용호동 공장


'바다를 메우자'는 발상은 오늘날의 문샷 싱킹(moonshot thinking)정신과 다를 바 없다. 남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급진적 혁신을 추구했던 창업자의 결단과 5형제들의 사즉생(死卽生)의 각오가 오늘의 동국제강을 만든 기반이었다.


연산 180만 톤의 철강재를 생산해 냈던 부산제강소는 부지가 주거지역으로 전환되어 1998년 전기로의 불을 끄고, 포항으로 이전했다. 그 자리에는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글 : 김종대 (스틸프라이스 대표, 철강 칼럼니스트)